한국 코미디계의 상징적 인물이자 '개그맨'이라는 용어를 창시한 전유성(全裕成)이 25일 오후 9시 5분경 전북대학교병원에서 향년 76세로 별세했다. 사인은 지병으로 앓아오던 폐기흉 증세의 악화로 공식 발표됐다.
임종 당시 유일한 직계 가족인 딸 전제비 씨가 그의 곁을 지켰다. 고인은 과거 폐렴을 앓았으며 코로나19 후유증으로 고생한 바 있고, 최근에는 기흉으로 폐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는 등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언론과 방송계는 일제히 그를 '개그계의 대부'로 칭하며 애도를 표했다. 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는 고인의 장례를 협회장인 '희극인장(喜劇人葬)'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여의도 KBS 본관 인근에서 노제(路祭)가 거행될 예정이다.
'개그맨' 용어 창시로 직업 정체성 확립
1949년 1월 28일 서울에서 태어난 전유성은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과 전신)를 졸업했다. 본래 정극 배우를 지망했으나 여러 차례 실패를 겪은 후, 1969년 TBC 동양방송의 인기 쇼 프로그램 '쇼쇼쇼(쑈쑈쑈)'의 방송 작가로 연예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희극인(喜劇人)'이나 '코미디언' 등 기존 용어를 대체할 '개그맨'이라는 신조어를 창시하고 대중화시킨 것이다. 이는 단순한 용어 변경이 아니라 악극단 출신 구세대 희극인들과 차별화되는, 방송 기반의 새로운 세대 코미디 전문가라는 직업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혁신적 행위였다.
지적 코미디로 패러다임 전환 이끌어
전유성은 슬랩스틱 위주였던 기존 코미디 흐름에 정면으로 반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했다. 그의 코미디는 '몸보다는 말로, 말보다는 글로 웃기는' 지적인 유머에 기반했다. 연극적 요소를 코미디에 접목하여 1970년대 방송 코미디의 지형을 바꿨으며, 이를 통해 한국 코미디는 상황적, 언어적 뉘앙스를 활용하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의 독창적 스타일은 KBS '유머 1번지'와 '쇼 비디오 자키' 등에서 빛을 발했다. 특히 '쇼 비디오 자키'의 인기 코너 '네로 25시'는 그의 독창적 아이디어가 집약된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개그콘서트' 기획으로 공개 코미디 시대 열어
현대 한국 방송 코미디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프로그램인 KBS '개그콘서트'의 탄생 배경에는 전유성이 있었다. 그는 소극장 개그를 방송과 결합하는 '공개 코미디'라는 포맷을 창시하고 기획했다. 이 형식은 이후 20년 가까이 한국 텔레비전 코미디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으며, 수많은 스타 개그맨을 배출하는 산실이 됐다.
세대 아우르는 인재 양성가로 활약
전유성은 '아이디어 뱅크'로 통했다. 후배들 사이에서는 "아이디어가 막히면 전유성을 찾아가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다. 그는 코미디언 정선희에게 "생활에 쓰이는 단어나 어휘가 다른 사람과는 달라야 한다"며 다독을 권하고, "총알을 많이 가지고 있으라"고 조언했다.
그가 발굴했거나 경력 초기에 결정적 도움을 준 인물들로는 팽현숙, 이경규, 최양락, 이윤석, 김신영, 조세호, 황현희, 김민경 등 세대를 아우르는 수많은 스타 코미디언들이 있다. 특히 배우 한채영을 발굴한 일화와 방송사 공채 시험에서 8번이나 낙방했던 이영자를 개인적으로 훈련시켜 MBC 특채로 데뷔시킨 일화는 전설처럼 회자된다.
2001년에는 개그 지망생들을 전문적으로 교육하기 위해 극단 '코미디시장'을 창단했다. 이후 활동 무대를 청도로 옮겨서도 '코미디시장'을 운영하며 수백 명의 지망생을 가르쳤고, 이 중 80여 명을 졸업시켜 프로의 길로 이끌었다. 예원예술대학교 코미디학과 교수로도 재직하며 조세호, 김신영과 같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지역 문화 발전에도 헌신
2007년 경상북도 청도로 귀촌한 전유성은 2011년 "코미디도 짜장면처럼 배달한다"는 기발한 발상으로 중국집 철가방 모양의 코미디 전용 극장인 '코미디철가방극장'을 개관했다. 이 극장은 서울 대학로가 아닌 지방 소도시에 세워진 최초의 코미디 전용관으로, 7년간 4,400회가 넘는 공연을 올리며 전국적 명소가 됐다.
한여름 가장 더운 날인 초복에 반려동물과 주인이 함께 즐기는 클래식 음악회 '개나소나콘서트'를 기획하는 등 독창적인 지역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냈다. 또한 피자와 짬뽕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메뉴만 판매하는 식당 '니가쏘다쩨'를 운영하며 화제를 모았다.
2018년 지역 축제 준비 과정에서 청도군과의 갈등으로 지역을 떠나 전북 남원시로 이주했다. 남원에서는 인월면 중군마을에 '국수교과서'라는 이름의 국숫집을 열어 지역 주민 및 방문객들과 소통했다. 딸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잡담쇼'와 같은 소규모 공연을 기획하고 지역 행사에 참여하며 조용히 자신의 재능을 나누었다.
다방면 활동으로 문화계 기여
그의 활동 영역은 코미디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등 다수의 영화에 감초 역할로 출연했으며, 1991년에는 심형래 주연의 영화 '칙칙이의 내일은 챔피언'을 직접 연출했다.
오리온, 롯데, 해태, 하이트맥주 등 당대 최고 브랜드들의 광고 모델로 활약했고, 전도연, 배용준 등 톱스타들과 함께 출연한 광고들은 그의 높은 대중적 인기를 증명했다. MBC 라디오에서 '여성시대 양희은, 전유성입니다', '전유성,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 등을 진행하며 MBC 연기대상 라디오 부문 우수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개인사와 마지막 순간들
전유성은 가수 진미령과 1993년부터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으나 2011년경 결별했다. 슬하에는 딸 전제비 씨와 외손자 김래오 군이 있다.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았으나 임종 직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주변인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저서로는 '전유성의 구라 삼국지',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 '컴퓨터, 1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 등이 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은 "유치하게 살아라"는 말처럼 어린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연예계 추모 물결
그의 별세에 연예계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가수 조영남은 절친했던 고인을 "후배들을 늘 챙기던 선량한 친구"로 기억하며 비통해했다. 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장 김학래는 "마지막 숨이 떨어질 때까지 대한민국 코미디 발전을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았다"고 고인을 기렸다.
코미디언 김대범은 그의 제자로서 "스승님처럼 나이를 먹어 가고 싶었다"며 "하늘에서 유성으로 계속 빛나며 여행하시기를 바란다"고 애도했다.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BICF)은 명예위원장이었던 고인에 대해 "든든한 스승이자 선구자"라는 공식 추모 성명을 발표했다.
전유성의 마지막 방송 출연은 6월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깜짝 등장한 것이었다. 이는 대중에게 그의 건강한 모습을 보여준 마지막 기록이 되었다.
한국 코미디 현대사를 관통한 전유성의 유산은 그가 창조한 웃음과 그가 닦아놓은 길을 걷고 있는 수많은 후배들의 활동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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