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구달 박사/JGI 자료


세계적인 동물행동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 박사가 10월 1일 미국 순회강연 중 캘리포니아에서 91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그녀의 부고는 단순한 한 시대의 끝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열정적으로 자신의 소명을 다했던 한 인간의 삶이 멈추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그 주에도 강연 일정이 잡혀있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그녀는 안락의자가 아닌 사명의 길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환경운동가 크리스 팩햄은 그녀가 사실상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순직"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과학자에서 활동가로의 전환이 얼마나 완전하고 확고했는지를 증명하며, 끊임없는 참여라는 그녀의 메시지를 자신의 삶으로 온전히 살아냈다는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아프리카 꿈꾼 소녀, 세계를 바꾸다

1934년 4월 3일 영국 런던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제인 구달의 유년기는 동물에 대한 깊은 매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빌리'라는 이름의 침팬지 인형과 '유인원 타잔', '닥터 두리틀' 같은 책들이 그녀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어린 제인이 아프리카에 가서 동물들과 함께 살며 그들에 관한 책을 쓰겠다고 꿈을 이야기했을 때,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시기에 돈도 없는 어린 소녀의 몽상이라며 대부분의 어른들은 웃어넘겼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녀의 어머니 밴나 모리스 구달은 달랐다. 그녀는 딸의 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지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열심히 노력하고, 기회를 잘 활용하고,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해." 이 어머니의 격려는 훗날 구달이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의 초석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6년 친구의 초대로 케냐의 농장으로 떠난 여행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1957년, 그녀는 저명한 고인류학자 루이스 리키 박사를 만나게 된다. 리키 박사는 처음에 그녀를 비서로 고용했지만, 곧 그녀의 인내심과 결단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규 과학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리키 박사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살아있는 친척인 침팬지를 연구하면 초기 인류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를 위해 그는 기존의 학문적 편견에 얽매이지 않은 '완전히 열린 마음'을 가진 관찰자가 필요했다. 그는 남성 중심의 과학계에서 여성이 더 인내심 있고 통찰력 있는 관찰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정규 교육 과정이 오히려 과학자들의 독창적인 시각을 잃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도구 사용 발견, 인류의 자기 인식 뒤흔들다

1960년, 26세의 나이로 탄자니아의 곰베 스트림 동물 보호구역에 도착한 구달은 당시 규정상 젊은 여성이 혼자 야생에 머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어머니와 동행해야 했다. 대학 학위도 없었고, 남성 중심의 과학계에 속한 여성이었으며, 그녀의 연구 방식은 비정통적이었다. 처음에는 약점으로 여겨졌던 이 모든 조건들은 역설적으로 그녀의 가장 큰 자산이 되었다.

1960년 가을, 그녀는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라고 이름 붙인 침팬지가 나뭇가지를 다듬어 흰개미 굴에 찔러 넣어 개미를 '낚시'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는 인간만이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한다는 오랜 믿음을 산산조각 낸, 20세기 과학계의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루이스 리키 박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전보를 보냈다. "이제 우리는 도구를 재정의하거나, 인간을 재정의하거나, 침팬지를 인간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 한 문장은 그녀의 발견이 일으킨 철학적 지진의 규모를 완벽하게 요약한다.

구달의 발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수년에 걸친 관찰을 통해 침팬지가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다른 동물을 사냥하고 고기를 먹는 잡식성 동물이며, 기쁨과 슬픔과 같은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각기 다른 뚜렷한 개성을 지닌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한 어미와 새끼 간의 강한 유대, 형제간의 경쟁 등 인간과 유사한 복잡하고 장기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조직적이고 영토적인 분쟁, 즉 '전쟁'을 벌인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4년에 걸친 '곰베 침팬지 전쟁'은 이들의 어두운 면모를 보여준 충격적인 기록이었다.

비정통적 방법론, 가장 심오한 통찰의 열쇠 되다

그녀의 연구 방법은 처음부터 과학계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연구 대상에게 번호 대신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 '플로', '플린트'와 같은 이름을 붙여주고, 멀리서 관찰하는 대신 그들의 공동체에 '이웃처럼' 몰입하는 그녀의 방식은 당시 과학계의 객관성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비과학적인' 행위로 폄하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바로 그 공감적 접근법이 침팬지들의 사회적, 감정적 삶에 대한 가장 심오한 통차을 가능하게 한 열쇠였다. 이러한 비정통적인 시작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발견이 가진 압도적인 중요성 덕분에 구달은 학부 학위 없이 196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동물행동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이례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녀의 연구는 '인간'과 '동물계'를 가르던 날카롭고 인위적인 경계선을 허물어뜨렸다. 이는 인류가 스스로를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존재가 아닌,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게 만드는 심오한 철학적 전환이었으며, 현대 환경보호 및 동물권 운동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1986년, 과학자에서 활동가로 극적 전환

제인 구달의 삶은 1986년 한 학술회의를 기점으로 극적인 전환을 맞이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프리카 전역의 침팬지들이 직면한 끔찍한 현실, 즉 삼림 벌채로 인한 서식지 파괴, 식용으로 인한 밀렵, 그리고 의료 실험실에서의 비참한 삶을 총체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이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과학자로서 그 회의장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나올 때는 활동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지칠 줄 모르는 옹호자'로 변모했다. 90세가 넘어서도 매년 300일 가까이 전 세계를 여행하며 환경 보전, 동물 복지, 환경 교육이라는 세 가지 기둥을 중심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제인 구달의 활동가로서의 삶은 그녀의 과학적 연구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연장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평생 연구 대상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음을 직시했고, 더 이상 객관적인 관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도적 유산: 연구소와 '뿌리와 새싹'

제인 구달은 1977년 '제인 구달 연구소(JGI)'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곰베에서의 연구를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동시에, 보존 노력을 전 세계적으로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JGI의 핵심 철학은 '지역사회 중심의 보존'으로, 야생동물 보호가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며,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개념이었다. 현재 JGI는 전 세계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남아프리카의 '침프 에덴'이나 콩고 공화국의 '침풍가'와 같은 유인원 보호구역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의 유산 중 가장 역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것은 아마도 '뿌리와 새싹' 프로그램일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1991년, 자신들이 마주한 문제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던 12명의 탄자니아 고등학생들과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뿌리와 새싹'의 사명은 젊은이들이 사람, 동물, 그리고 환경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프로젝트를 스스로 기획하고 이끌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이름에 담긴 비유는 그녀의 철학을 잘 보여준다. "뿌리는 땅속 어디에나 뻗어 나가 단단한 기초를 만듭니다. 새싹은 매우 연약해 보이지만, 빛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벽돌담을 뚫고 나올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벽돌담은 인류가 지구에 가한 모든 문제들을 상징한다. 이 작은 아이디어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현재 75개국 이상에서 활동하는 세계적인 청년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모든 개인은 중요하고, 변화를 만든다"

제인 구달의 후반기 삶은 그녀의 독특한 '희망의 철학'을 전파하는 데 바쳐졌다. 이는 단순한 낙관론이 아니라, 지구적 위기에 맞서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전략이었다.

그녀의 메시지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핵심은 "모든 개인은 중요합니다. 모든 개인은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모든 개인은 변화를 만듭니다"라는 말이다. 이는 거대한 문제 앞에서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을 극복하게 하는 강력한 주문이었다.

그녀는 희망을 '수동적인 희망 사항'이 아니라 '행동과 참여를 요구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녀에게 희망은 현실의 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맞서는 생존 도구였다. 그녀는 변화를 위한 명확한 공식을 제시했다. "오직 우리가 이해해야만,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만, 도울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도와야만, 모두가 구원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철학은 국제 사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2년, 그녀는 유엔 평화대사로 임명되었으며, 스스로 이 직책을 가장 소중한 영예로 여겼다. 그녀는 이 직위를 활용하여 '뿌리와 새싹 국제 평화의 날'과 거대한 평화의 비둘기 인형 캠페인을 통해 환경 보호 문제를 세계 평화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활동을 펼쳤다.

전 세계가 애도하다

제인 구달 박사의 별세 소식에 전 세계 각계각층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은 "그녀의 행동주의, 비전,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는 지구를 보호하기 위한 세계적인 운동을 동원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그녀의 획기적인 연구는 과학 분야의 여러 세대 여성들에게 문을 열어주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우리 자신과 지구를 보호해야 할 우리의 책임에 대해 가르쳐주었다"고 언급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그녀는 인류와 우리 행성을 위한 비범한 유산을 남기고 떠났습니다"라고 애도했으며,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우리가 유인원을 보는 방식을 바꾸었다"고 평가했다.

세계자연기금(WWF)은 그녀를 "선을 위한 힘"이라고 칭했고, 그린피스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환경 거인 중 한 명"이라고 추모했다. PETA는 "우리가 동료 동물을 보는 방식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고 밝혔다.

서식스 공작 부부(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는 그녀를 "선구적인 인도주의자이자 우리의 친구"라고 불렀고,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지구를 위한 진정한 영웅 당신은 나의 영웅입니다"라며 존경을 표했다. 빌 & 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멀린다 프렌치 게이츠는 "세상과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고 말했다.

"당신이 하는 일은 차이를 만든다"

꿈 많은 소녀에서 혁명적인 과학자로, 그리고 마침내 희망과 행동의 세계적인 상징으로 이어진 제인 구달 박사의 비범한 여정은 이제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유산은 책이나 과학 논문 속에 정적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 그것은 제인 구달 연구소의 끊임없는 활동, '뿌리와 새싹'의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 그리고 그녀에게 영감을 받은 수백만 명의 개인들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힘이다.

그녀는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과업은 이제 우리 모두의 몫이 되었다. 그녀의 삶은 우리에게 하나의 분명한 메시지를 남긴다. "당신이 하는 일은 차이를 만듭니다. 그리고 당신은 어떤 종류의 차이를 만들고 싶은지 결정해야 합니다."

#제인구달 #동물행동학자 #환경운동가 #침팬지연구 #뿌리와새싹 #희망의철학 #유엔평화대사 #제인구달연구소 #도구사용발견 #곰베연구 #생물다양성 #기후변화 #동물권운동 #환경보호 #청년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