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후(戰後) 정치사의 상징적 인물인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가 16일 별세했다. 향년 101세. 그의 짧았던 총리 재임 기간(1994년 6월~1996년 1월)은 국제적으로는 역사적 화해의 이정표를, 국내적으로는 위기관리 실패의 전형을 남긴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 시기였다.
예상치 못한 총리의 탄생
무라야마는 1924년 오이타현(大分県)의 가난한 어부 집안에서 11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1944년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제국 육군에 이등병으로 징집된 그는 상관들의 부정부패, 목총으로 훈련해야 할 만큼 열악했던 보급 상황, 미군 공습을 직접 경험하며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생각이 종전을 계기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졸업 후 지방 정계에서 정치 경력을 시작한 그는 일본사회당 소속으로 1972년 처음 중의원에 당선된 이후 8선에 성공했다. 복지와 연금 문제에 천착하며 '연금의 톤짱'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그는 19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의석수가 136석에서 70석으로 급감하는 참패를 당한 뒤 당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그를 총리직으로 이끈 것은 개인의 정치력이 아니라 일본 정치사의 거대한 지각변동이었다. 1993년 38년간 지속된 자유민주당(自由民主黨)의 장기 집권 체제, 이른바 '55년 체제'가 붕괴했다. 권력을 되찾기 위한 절박함 속에서 자민당은 냉전 시대 내내 이념적 숙적이었던 일본사회당, 그리고 소수 정당인 신당 사키가케(新黨さきがけ)와 손을 잡고 연립정권을 구성했다.
사회당이 정부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평화헌법, 미일안보조약, 자위대의 지위 등 당의 핵심 정체성을 사실상 포기하고 자위대 합헌과 미일안보조약 견지라는 자민당 노선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러한 굴욕적인 양보의 대가로 자민당은 총리직을 사회당 위원장인 무라야마에게 양보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무라야마 담화, 일본 공식 사죄의 정점
1995년 8월 15일 발표된 무라야마 담화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이라는 역사적 이정표, 자민-사회-사키가케 연립정권이라는 특수한 정치적 구도, 그리고 무라야마 개인의 확고한 의지가 결합된 산물이었다.
무라야마는 처음 국회 결의안을 통해 과거사 문제를 매듭짓고자 했으나 자민당 내 우파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당시 소장파 의원이던 아베 신조(安倍晋三)를 포함한 많은 의원들이 표결에 불참하면서 결의안은 원안보다 후퇴한 내용으로 채택됐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무라야마는 정치 생명을 거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내각의 공식 결정(閣議決定)을 거친 총리 담화를 발표하겠다고 선언하며, 만약 내각이 이를 승인하지 않을 경우 총리직에서 사임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갓 출범한 연립정권의 붕괴를 무릅쓴 이 고도의 정치적 압박은 결국 자민당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공식 명칭 '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인 담화의 핵심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와 같은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이 담화는 공식적인 각의 결정을 거쳤기 때문에 무라야마 개인의 사견이 아닌 당시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라는 점에서 막대한 무게를 지닌다.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에 '식민지 지배(植民地支配)'와 '침략(侵略)'이라는 단어가 명시된 순간이었다.
한국의 복잡한 반응
담화 발표 직후 한국에서의 반응은 복합적이었다. 이제까지 나온 사죄 중 가장 직접적이고 진일보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었으나, 동시에 깊은 회의론도 존재했다. 경향신문은 구체적인 보상 약속 등 과거사 청산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이 결여되었다고 비판했으며, 동아일보는 다른 정치적 목적을 가진 '형식적 반성'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했다.
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무라야마 총리는 담화 발표 이후 일본 국회에서 "한일병합조약은 당시 국제관계 등 역사적 사정 속에서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되고 실시된 것"이라고 발언하여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빗발치는 비판 속에 해당 발언이 "실언(gaffe)"이었다고 사과했지만, 조약 자체가 불법이었다고 명확히 인정하지는 않았다.
무라야마 담화는 발표 이후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자리 잡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나 아베 신조와 같은 보수 성향의 후임 총리들조차 공식적으로는 담화를 계승한다고 천명해야 했다. 담화는 이후 모든 일본의 역사 관련 담화를 측정하는 기준선이 되었다.
위기 관리의 참담한 실패
1995년 1월 17일 고베(神戸) 지역을 강타한 한신·아와지(阪神・淡路) 대지진은 무라야마의 국내 총리직을 규정하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정부의 대응은 재앙에 가까울 정도로 더뎠다. 지진 발생 후 4시간 이상이 지난 오전에야 비상재해대책본부가 설치되었고, 긴급 대책은 다음 날에야 발표되었다. 이 초기 대응의 실패는 인명 피해와 고통을 가중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1995년 3월 20일에는 사이비 종교 집단인 옴진리교(オウム真理教)가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하여 13명이 사망하고 6천 명 이상이 부상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지진 발생 불과 두 달 만에 일어난 이 테러는 압도적인 위기 상황에 놓인 리더십 아래 국가가 표류하고 있다는 인상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정부가 결국 옴진리교를 강제 해산시키고 범인들을 검거했지만, 두 개의 대형 참사가 연이어 터지면서 무라야마 정권 하에서 일본의 근본적인 시스템이 붕괴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다.
무라야마는 개인적으로 청렴하고 겸손하며 진실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권력 의지가 약한 지도자로 비쳤다. 재임 중 여러 차례 사의를 표명했다가 각료들의 만류로 겨우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리더십은 우유부단하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그의 내각은 연립정권 파트너 및 소속 정당 내의 노선 갈등으로 끊임없이 시달렸다.
아시아여성기금의 좌절
1995년에 설립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通稱 아시아여성기금)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무라야마 정부의 시도였다. 이 기금은 일본 국민들의 민간 성금으로 '위로금(償い金)'을 지급하고, 일본 정부 예산으로 의료 및 복지 지원 사업을 병행하는 구조로 설계되었다. 피해자들에게는 무라야마 총리의 사죄 편지가 함께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 기금은 한국의 피해자들과 지원 단체들로부터 압도적인 거부에 직면했다. 거부의 핵심적인 이유는 기금이 일본 정부의 직접적인 법적 배상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이는 모든 청구권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틀을 유지하려는 시도로 해석되었다. 피해자들은 정부가 법적 책임을 회피한 채 민간의 돈으로 자신들을 회유하려는 시도라며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국제앰네스티와 같은 국제 인권 단체 역시 이 기금이 국제적인 배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수년이 흐른 뒤, 무라야마 자신도 아시아여성기금이 실패였음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는 일본 정부 내부의 타협안을 만드는 데 급급하여 한국 피해자들의 이해와 동의를 먼저 구하지 않은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고 시인했다. 그는 "어떤 해결책이든 반드시 피해자의 의사를 중심에 두어야 하며, 양국 정부와 국민의 완전한 합의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고 통감했다고 밝혔다.
논란이 된 외교적 행보
1994년 김일성(金日成) 주석 사망 당시, 무라야마는 총리 자격이 아닌 사회당 위원장 자격으로 "위대한 지도자 김 주석의 갑작스런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내용의 조전(弔電)을 보냈다. 이는 사회당과 북한 노동당 간의 오랜 우호 관계에 따른 것이었지만, 한국과 일본 보수층에서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이중적 유산
한국에 대한 무라야마의 유산은 불가분하게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 공식 사죄의 '황금률'로 남아 있으며, 한국 정부와 시민 사회가 역사 수정주의에 맞서기 위해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외교적 기준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총리 재임 기간은 그 사죄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다. 아시아여성기금의 실패에서 증명되었듯이, 반성의 말을 피해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무라야마는 과도기적이었고, 여러 면에서 우연히 탄생한 지도자였다. 그의 짧은 집권기는 국내적 혼란과 무능이라는 평가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개인적 신념과 독특한 정치적 순간의 결합을 통해, 이 단명한 총리는 역사적으로 지워지지 않을 중요한 성취를 이뤄냈다. 그는 진정한 화해의 가능성과, 그 길을 가로막는 막강한 정치적·법적 장벽을 동시에 상징하는 인물로 한국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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