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이재명 대한민국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간 첫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시 주석으로서는 2014년 이후 11년 만의 국빈 방한이자, 이 대통령 취임 이후 첫 대면 회담이라는 상징성을 지닌 이번 회담은 2016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결정 이후 약 9년간 지속된 양국 간 갈등을 공식적으로 전환하는 자리로 평가된다.
이 대통령은 2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한중관계를 전면적으로 회복하게 됐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다"며 "전략적 협력 동반자로서 실용과 상생의 길로 다시 함께 나아가게 됐다"고 밝혔다.
경제·민생 분야 7대 합의문서 체결
이번 회담의 가장 구체적인 성과는 총 7건의 양해각서(MOU) 및 계약 체결이다. 양국은 5년 만기 70조 원(4,000억 위안) 규모의 원-위안 통화스와프 계약을 연장하고,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2단계 서비스·투자 협상 가속화를 위한 서비스무역 교류·협력 강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또한 고령화 사회 대응을 위한 실버산업 협력 양해각서, 혁신창업 협력 양해각서, 한국산 농산물의 중국 수출 절차 원활화를 위한 중국 수출 식물검역요건 양해각서가 체결됐다. 특히 보이스피싱과 온라인 사기 범죄 등 초국가 스캠 범죄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양해각서를 통해 '한중 공동대응 협의체'가 발족됐으며, 향후 5년간의 호혜적 협력을 위한 한중 경제협력 공동계획(2026-2030) 양해각서도 체결됐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브리핑을 통해 "한중 관계를 전면적으로 복원하는 성과가 있었다"며 "양 정상이 민생이 가장 중요하다는 공감대를 이루었으며, 양국 국민의 민생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밝혔다.
북핵 문제 중국 측 발표서 누락… 안보 현안 온도차 확인
하지만 수면 아래 민감한 안보 현안에 대해서는 양국 간 명확한 온도차가 드러났다. 한국 대통령실은 이 대통령이 시 주석에게 "북한과의 대화 재개를 위한 중국의 건설적인 역할"을 당부했다고 밝혔으나, 중국 외교부의 공식 발표문과 신화통신, 인민일보 등 관영매체 어디에도 '북핵(北核)' 또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단어는 포함되지 않았다.
위성락 안보실장의 브리핑에 따르면, 중국 측은 한반도 평화 안정에 협력할 용의를 밝히면서도 "대화 재개를 위해선 미북 대화가 제일 중요하다"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고 전했다. 신봉섭 광운대 교수는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나머지 민생 부분에서 공감대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많이 기울였는데, 이는 참신한 접근이었다"고 평가했다.
핵추진 잠수함 논란에 시 주석 "유의한다"
회담 직전인 10월 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NPS) 건조를 승인하면서 그 필요성으로 "북한, 중국 잠수함 추적 활동"을 언급해 중국의 강한 반발을 샀다. 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핵추진 잠수함이 방어적 성격의 전력이라는 점을 중국 측에 설명했으며, 시 주석은 "유의한다(I take note)"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 용어로서 '유의한다'는 '동의한다' 또는 '이해한다'와는 거리가 멀며, 상대방의 발언을 접수했음을 확인하지만 그 내용에 동의하거나 지지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중립적이거나 냉소적인 표현에 가깝다.
이 외에도 중국이 10월 한화오션의 미국 자회사 5곳에 가한 제재 문제가 논의됐으나, 위성락 실장은 "미중 무역 분쟁이 해결될 때" 함께 해결될 것으로 본다고 언급해 사실상 한중 양자 차원에서 해결이 어려운 사안임을 시인했다.
'한한령' 해제 논란… 정부와 민간 위원회 엇갈린 입장
9년간 지속된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 해제 가능성도 관심을 모았다. 국빈 만찬에서 시 주석이 박진영 JYP 위원장(대중문화교류위원회 위원장)에게 '베이징에서 공연하자'는 제안에 호응하며 왕이(王毅) 외교부장에게 즉석 지시를 내렸다는 일화가 보도됐다.
위성락 안보실장은 한한령과 관련해 "(회담에서) 엄격하게 논의되지는 않았으나 진전이 있었다"며 "문화 교류·협력을 많이 하자는 공감대가 있었고 향후 실무적 소통을 통해 조율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긍정적인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나 11월 2일 대중문화교류위원회는 보도자료를 통해 "시 주석과 박 위원장의 대화는 공식 외교행사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며 건넨 원론적 수준의 덕담이었다"고 밝히며 "이에 대해 과도하게 해석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성급하다는 판단"이라고 선을 그었다.
중국, '여론 인도'와 '부정 동향 억제' 명시적 요구
시 주석은 이번 회담에서 한중 관계를 "이사 갈 수 없는 중요하고 가까운 이웃이자 떼려야 뗄 수 없는 협력 동반자"로 규정하며 한중 관계 발전을 위한 4가지 제안을 제시했다. 전략적 소통 강화, 호혜 협력 심화, 국민 감정 증진(민심상통·民心相通), 다자 협력 긴밀화가 그것이다.
특히 국민 감정 증진과 관련해 시 주석은 "여론과 민의에 대한 인도를 강화하고, 긍정적 메시지를 확산하며 부정적 동향을 억제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요구했다. 시 주석은 또한 회담에서 "모순(矛盾)"과 "의견 차이(分歧)"를 "우호적 협의를 통해 적절히 잘 처리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정치권 평가 엇갈려… "성과" vs "빈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평화가 곧 경제임을 관철해 낸 정부의 큰 성과"라고 평가하며 70조 원 규모의 통화스와프 연장, 7건의 민생 양해각서 체결 등 실질적인 경제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반면 야당인 국민의힘은 "당면한 현안을 해결하지 못한 빈손 회담"이라며 한화오션 제재, 서해 불법 구조물 문제, 북핵 문제 등 핵심 안보·경제 현안에서 중국으로부터 뚜렷한 해결책이나 양보를 얻어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김재천 서강대 교수는 "중국과 구조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낮은 단계의 인적, 교육, 문화 교류 등을 하겠다고 한 것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시 주석은 이 대통령에게 방중을 초청했으며, 양국은 고위급 소통 채널 정례화와 인적·지방 간 교류 확대에도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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