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3일 치러진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영어 영역의 초고난도 논란이 영국 주요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국제적 이슈로 비화했다. 비비시(BBC), 텔레그래프(The Telegraph), 가디언(The Guardian) 등 영국 정론지들은 한국 수험생들이 "고대 문자를 해독하는 것 같다"며 "미쳤다(insane)"고 표현한 이번 시험을 상세히 보도하며, 실제 문제를 독자들에게 직접 풀어보도록 권유하기까지 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KICE)의 채점 결과에 따르면, 영어 영역에서 1등급(90점 이상)을 획득한 수험생 비율은 3.11%에 불과했다. 이는 절대평가가 도입된 2018학년도 이후 가장 낮은 수치이며, 상대평가 시절의 1등급 비율 4%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과였다. 전년도 1등급 비율이 6%대였던 점을 감안하면 난도가 급격히 상승했음을 알 수 있다.
BBC는 12일 보도를 통해 "일부 학생들은 이 시험을 고대 문자(ancient script) 해독에 비유하고, 또 일부는 '미쳤다'고 표현한다"며 한국 학생들이 겪는 고통을 생생히 전달했다. 비비시는 단순히 어렵다고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장 논란이 된 34번 문항과 39번 문항을 기사에 그대로 실어 영어 모국어 사용자들에게 직접 풀어보게 했다.
34번 문항은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법철학을 다뤘다. 지문은 칸트가 법의 지배를 자유의 궁극적 보장으로 봤다는 내용으로 시작해, "악마들의 국가(a nation of devils)조차도 법적 시스템 안에서는 조화롭게 살 수 있다"는 주장을 인용했다. 이 문제는 영어 어휘력보다 고도의 철학적 논증 과정을 따라갈 수 있는지를 묻는 것으로,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Reddit)에서는 "이것은 영어 시험이 아니라 논리학 시험이다"라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39번 문항은 비디오 게임 내 아바타와 존재론을 다룬 현상학적 텍스트였다. 이 문제는 원어민 교수들과 인공지능조차 오답을 선택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한 원어민 교수는 "질문의 난이도가 터무니없으며(ridiculous), 원어민의 상당수가 풀기 어려울 것"이라고 평했다. 챗지피티(ChatGPT)조차 정답 대신 오답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이 문제의 논리적 연결 고리가 얼마나 모호했는지를 보여준다.
텔레그래프는 "당신은 한국의 '미친' 대학 입학 영어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Can you pass Korea's 'crazy' college entrance English exam?)"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 기사에 달린 댓글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것은 "이 대학 입시시험은 왜 한국에는 삼성이 있고, 영국에는 스타머(현 총리)와 '스트릭틀리'가 있는지를 설명할 수도 있겠네"라는 풍자적인 내용이었다.
가디언은 24번 문항의 '컬처테인먼트(culturtainment)'라는 단어가 야기한 혼란을 집중 조명했다. 이 용어는 리즈 베켓 대학교(Leeds Beckett University)의 스튜어트 모스(Stuart Moss) 교수가 쓴 저서에서 유래한 것으로 확인됐다. 보도에 따르면, 이 표현을 만든 학자조차 수능 문제로 변형된 지문을 보고 "난해하다(abstruseness)"고 인정했다. 이 용어는 옥스퍼드 사전이나 네이버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전문 용어다.
가디언은 또한 한국의 수능이 "명문대 입학에 필수적이며, 사회적 지위 상승, 경제적 안정, 심지어 좋은 결혼으로 가는 관문"으로 여겨진다고 분석했다. '좋은 결혼'까지 수능과 연결 짓는 시각은 한국 사회의 입시 만능주의가 개인의 생애 주기 전체를 지배하고 있음을 서구 언론이 간파했음을 보여준다.
이번 사태는 행정적 파장으로 이어졌다. 오승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은 12월 10일 전격적으로 사의를 표명했다. 오 원장은 "2026학년도 수능 영어 영역 문항이 절대평가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아 수험생과 학부모들에게 심려를 끼치고 입시에 혼란을 야기한 점에 대해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고 밝혔다.
오 원장의 사임은 한국 교육 당국이 처한 모순적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부는 사교육비 경감을 위해 교과 과정 밖의 '킬러 문항'을 철저히 배제할 것을 지시했으나, 최상위권 대학 입시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시험이 너무 쉬워지면 변별력을 상실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결과적으로 평가원은 지문의 소재는 교과서나 이비에스(EBS) 연계 교재에서 가져오되, 선택지나 논리 구조를 극도로 비틀어 난이도를 높이는 방식을 택했다.
영국 언론의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한국식 능력주의(Meritocracy)의 극한을 목격한 서구 사회의 충격과 성찰이 담겨 있다는 분석이다. 텔레그래프 댓글에 나타난 '삼성 대 스타머' 대조는 영국 독자들이 한국 학생들의 고통에 경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극한의 경쟁이 한국을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만든 원동력일 수 있다는 자조적 인식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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