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6일 의회 난입 사태/보도영상 캡춰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미국 대통령이 영국 공영방송 BBC를 상대로 100억 달러(약 14조 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5일(현지시간) 플로리다 남부 연방지방법원에 접수된 이번 소송은 현직 대통령이 최우방국의 핵심 미디어 기관을 직접 타격했다는 점에서 전례 없는 외교적 사건으로 비화하고 있다.

소송의 발단은 지난해 10월 28일 방영된 BBC 탐사보도 프로그램 '파노라마(Panorama)'의 다큐멘터리 《트럼프: 두 번째 기회?(Trump: A Second Chance?)》다. 트럼프 측은 이 프로그램이 2021년 1월 6일 의회 난입 사태 직전 자신의 연설을 악의적으로 편집해 시청자들이 대통령이 폭력을 직접 선동한 것처럼 오인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변호인단은 소장에서 BBC가 약 55분의 시차가 있는 두 개의 발언을 교묘하게 이어 붙여 문맥을 완전히 왜곡했다고 밝혔다. 실제 연설에서 트럼프는 오후 12시 15분경 "여러분이 곧 의사당으로 행진하여 평화롭고 애국적으로(peacefully and patriotically) 목소리를 낼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약 55분이 지난 오후 1시 10분경에는 "우리는 싸웁니다. 지옥같이 싸웁니다. 지옥같이 싸우지 않으면 여러분은 더 이상 나라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발언했다.

그러나 BBC는 편집 과정에서 '평화적으로(peacefully)'라는 핵심 수식어를 삭제하고 55분이라는 시간적 간격을 없앴다. 결과적으로 다큐멘터리 속 트럼프는 "우리는 의사당으로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옥같이 싸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묘사됐다. 트럼프 측은 소장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그 단어들의 조합(sequence of words)을 결코 말한 적이 없다"고 강조하며, 이것이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 '창작된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소송은 명예훼손(Defamation)과 플로리다 기만적 불공정 거래 관행법(FDUTPA) 위반을 근거로 각각 50억 달러씩 청구됐다. 트럼프 측은 BBC가 "좌파적 정치 어젠다(leftist political agenda)"를 위해 시청자를 기만했다고 주장하며, 이는 대선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뻔뻔한 시도(brazen attempt to interfere)"였다고 밝혔다.

BBC 내부에서 유출된 '프레스콧 메모(Prescott Memo)'는 트럼프 측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11월 6일 데일리 텔레그래프를 통해 공개된 이 문서에서 마이클 프레스콧(Michael Prescott) 전 BBC 편집 표준 자문위원은 1·6 의회 난입 관련 트럼프 연설 편집이 시청자를 오도했다는 점을 BBC 내부에서도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나 적절한 시정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프레스콧은 또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보도에서 이중 잣대를 적용하고, 트랜스젠더 이슈 및 영국 식민지 역사에 대해 편향된 시각을 보였다고 비판하며 BBC의 '제도적 편향(systemic bias)'을 고발했다. 이에 따라 11월 팀 데이비(Tim Davie) BBC 사장과 데보라 터니스(Deborah Turness) 보도본부장이 연이어 사퇴했다.

사미르 샤(Samir Shah) BBC 회장은 해당 편집에 대해 "판단 착오(error of judgment)"를 인정하고 사과 서한을 발송했다. 그러나 터니스는 사퇴 성명에서 "BBC 뉴스가 제도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반박했다.

이번 소송은 법정을 넘어 외교 무대로 확산되고 있다. 소송 제기 직후인 12월 16일, 미국은 지난 9월 트럼프 대통령의 영국 국빈 방문 당시 키어 스타머(Keir Starmer) 영국 총리와 합의한 400억 달러 규모의 '기술 번영 협정(Tech Prosperity Deal)' 이행을 전격 중단한다고 통보했다.

미국 측은 공식적으로 영국의 '디지털 서비스세(Digital Services Tax)'가 미국 테크 기업에 부당한 부담을 주고, 영국의 엄격한 식품 안전 규제가 미국 농산물 수출을 막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외교가에서는 소송 제기 직후 협정 중단 소식이 전해진 시점상의 일치가 우연이 아니라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 정치권은 이번 사태를 두고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스티븐 키녹(Stephen Kinnock) 보건부 장관은 "BBC가 트럼프에 맞서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옳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인 반면, 케미 베이드녹(Kemi Badenoch) 보수당 당수는 BBC의 편집을 "가짜 뉴스"라고 강력히 비판하며 트럼프의 입장을 옹호했다. 리즈 트러스(Liz Truss) 전 총리 역시 BBC의 편향성이 "거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100억 달러 소송은 BBC의 재정적 존립을 위협한다. BBC의 2024~25년 기준 수신료 수입은 약 38억 파운드(약 50억 달러) 수준으로, 소송 청구액은 연간 수입의 약 2배에 달한다. BBC가 패소하거나 막대한 합의금을 지불해야 할 경우, 이미 넷플릭스 등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 밀려 위기를 겪고 있는 수신료 제도 폐지론에 불을 붙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BBC 측은 "우리는 이번 소송을 강력히 방어할 것"이라며 맞서는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BBC소송 #1·6의회난입 #미영외교갈등 #프레스콧메모 #기술번영협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