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참여한 안보리 공개토의 모습/대통령실 자료
미국의 유엔 탈퇴 또는 실질적 이탈이 단순한 회원국 하나의 공석을 넘어 전후 국제 질서의 근간을 뒤흔드는 지각변동으로 다가오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alone)' 외교 정책으로 대표되는 일방주의 전략이 정점에 달하면서 유엔의 존립 자체가 위기에 직면했다. 이미 주요 유엔 기구 탈퇴, 재정 지원 대폭 삭감, 평화유지활동(PKO) 분담금 전액 삭감 등 구체적 조치들이 현실화되고 있다.
재정 지배력, 유엔 운영의 생명줄
미국은 유엔 정규 예산의 22%인 약 8억2,000만 달러를 분담하고 있으며, PKO 예산의 경우 분담률은 26.95%로 책정돼 있으나 미국 국내법상 25%로 제한된다. 2017 회계연도부터 2022 회계연도 사이에만 10억 달러가 넘는 체납금이 누적됐다.
자발적 기여금 부문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더욱 두드러진다. 2024년 미국은 전 세계 인도주의 지원의 40%인 140억 달러 이상을 제공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화로 세계식량계획(WFP)에 대한 지원은 90% 이상 삭감됐고, 유엔아동기금(UNICEF) 지원도 11억 달러에서 1억6,800만 달러로 급감했다.
전직 유엔 대사들은 "미국의 리더십 없이는 유엔에서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조셉 휠러 전 USAID 관리는 "미국은 거의 모든 주제에 노하우를 제공할 수 있는 독보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거부권, 양날의 검
미국의 정치적 권력은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와 거부권에서 절정을 이룬다. 2023년 10월 부터 올 9월 까지 미국은 '중동 상황, 팔레스타인 문제 포함'을 의제로 한 결의안에 대해 6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다.
많은 회원국, 특히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이를 강대국의 이중 잣대로 간주하며, 안보리가 국제법을 공평하게 적용하는 중립적 기구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현장의 파국적 결과
WFP는 지난해 미국으로부터 43억 달러를 지원받았으나, 올해 현재까지 지원액은 3억2,500만 달러로 90% 이상 급감했다. WFP는 전체 직원의 최대 30%를 감축할 것으로 예상되며, 한 WFP 관리는 이를 "지난 25년간 기관이 본 가장 대규모의" 감축이라고 묘사했다.
UNICEF의 초기 분석에 따르면 올해 최소 1,400만 명의 어린이가 영양 지원 및 서비스 중단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자금 부족으로 5월이면 치료식(RUTF) 재고가 소진돼 매달 치료가 필요한 약 74,500명의 어린이에게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본부 및 지역 사무소 비용을 30% 절감하고 고위직을 50% 감축하는 대규모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UNHCR은 "자금 부족이 난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파괴적이며 앞으로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과거의 교훈: 유네스코와 WHO
1984년 레이건 행정부의 유네스코 탈퇴는 연간 예산의 25%에 해당하는 재정적 타격을 입혔다. 미국은 19년 동안 발언권을 잃었고, 2017년 두 번째 탈퇴 기간 동안 중국이 공백을 채우며 교육 분야 인공지능(AI) 표준 설정과 같은 의제를 주도했다.
2020년 팬데믹 와중에 WHO 탈퇴를 결정한 것은 리더십 포기로 비춰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WHO 자금 지원을 중단하자 중국은 즉시 3,000만 달러 기부를 약속했다.
중국의 대전략: 설계자로의 부상
중국은 글로벌 개발 이니셔티브(GDI), 글로벌 안보 이니셔티브(GSI), 글로벌 문명 이니셔티브(GCI), 글로벌 거버넌스 이니셔티브(GGI) 등 상호 연결된 거대 구상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GGI의 핵심은 유엔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하는 데 있다. 중국은 서구가 주도하는 '규칙 기반 질서'가 서구의 지배를 반영해왔다고 비판하며 "진정한 다자주의"를 구현하겠다고 주장한다. GGI가 해결해야 할 기존 국제기구의 세 가지 결함으로 ①글로벌 사우스의 심각한 과소 대표성 ②유엔 권위의 침식 ③AI, 사이버 공간 등 새로운 영역에서의 효율성 증대 시급성을 지적한다.
러시아의 파괴적 역할
러시아는 새로운 시스템 구축보다는 미국 주도 기존 시스템 해체에 초점을 맞춘다. 러시아에게 '규칙 기반 질서'는 서구 패권주의의 동의어에 불과하며, 강대국들이 각자의 영향권을 인정받는 '다극 세계 질서'를 주창한다.
안보리에서 러시아는 중국과 빈번하게 공조하며 이란 제재와 같은 서방의 이니셔티브를 저지한다. 중국이 대안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동안 러시아는 기존 시스템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역할을 맡아 양동 공격을 형성한다.
유럽연합의 딜레마
EU는 전체 회원국을 합치면 유엔의 최대 재정 기여 그룹이지만, 이주·안보·대중국 정책 등 핵심 현안에 대한 회원국 간 이견으로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EU는 통합된 군사력과 정치적 결단력도 갖추지 못했다.
미국의 탈퇴는 EU에게 적대적 러시아와 경쟁적 중국 사이에서 어려운 균형을 잡아야 하는, 제도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선택을 강요할 것이다.
안보리 개혁의 가속화
미국의 이탈은 안보리 개혁 교착 상태를 산산조각 낼 것이다. 현재 안보리 구성은 1945년 세계를 반영할 뿐 2025년 현실을 담지 못하고 있다. 브라질·독일·인도·일본으로 구성된 G4 국가들은 상임이사국 지위를 요구하고 있다.
중국은 글로벌 사우스의 옹호자를 자처하며 더 대표성 있는 안보리를 만들기 위한 논의를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 역설적으로 다자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공격인 미국의 탈퇴가 다자주의 시스템의 가장 시급한 개혁을 촉발하는 것이다.
2040년 시나리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스팀슨 센터, 미국 국가정보위원회 등의 분석은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경쟁적 질서'에서는 유엔이 미·중 경쟁의 투기장이 되어 시스템이 마비된다. '파편화된 세계'에서는 유엔의 중심적 권위가 붕괴하고 지역 블록들이 대체한다. '적응형 네트워크'에서는 유엔이 성공적으로 개혁을 거쳐 유연한 '다중 벡터' 포럼으로 진화한다.
9월 개최된 '미래를 위한 정상회의'와 같은 노력들은 유엔 시스템을 21세기에 맞게 조정하려는 시도이지만, 미·중, 동·서, 남·북 간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성공 여부는 불투명하다.
재편된 세계의 도래
미국 없는 유엔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변모할 것이다. 유엔의 역할은 보편적 가치를 전파하는 이상적 기구에서, 경쟁하는 강대국들 간의 경쟁을 관리하고 파국을 막는 실용적 협상장으로 재정의될 것이다.
미국의 탈퇴는 다자주의의 종말이 아니라 미국이 주도하던 특정 버전의 다자주의가 결정적으로 막을 내렸음을 의미한다. 새로운 세계 질서를 정의하기 위한 투쟁이 21세기의 지배적 지정학적 서사가 될 것이며, 변화된 유엔은 그 투쟁의 중심 무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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