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에서 태국과 캄보디아 간 국경 분쟁이 전면적 무력 충돌로 비화하면서 지역 안보에 비상등이 켜졌다. 지난 7월 48명의 사상자를 낸 '5일 전쟁'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말레이시아 안와르 이브라힘 총리의 중재로 체결된 '쿠알라룸푸르 평화 협정(Kuala Lumpur Peace Accord)'이 불과 6주 만에 사실상 무력화됐다. 7일(현지시간) 재개된 교전은 중화기 포격전을 넘어 태국 공군(RTAF)의 F-16 전투기가 2011년 이후 최초로 투입되는 등 전례 없는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충돌은 7일 일요일 새벽 우본라차타니 주(태국)와 프레아 비헤아 주(캄보디아) 경계의 '총 안 마(Chong An Ma)' 고지에서 시작됐다. 태국군은 오전 5시 5분경 캄보디아군이 소화기와 곡사화기로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한 반면, 캄보디아 국방부는 태국군의 선제 도발이라고 맞섰다. 초기 소규모 교전은 곧 포병전으로 확대됐고, 태국군은 105mm 및 155mm 야포로 캄보디아 측 '무기 지원 진지'를 타격했으며 캄보디아군은 BM-21 다연장 로켓포로 응수했다.

사태는 8일 더욱 악화됐다. 태국군 병사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자 태국 공군은 F-16 전투기를 출격시켜 캄보디아 영토 내 군사 목표물을 타격했다. 태국 육군 참모총장 차이야프륵 두앙프라팟(Chaiyapruek Duangprapat) 대장은 "캄보디아의 군사 능력을 장기적으로 마비시켜 미래 세대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전투는 우본라차타니를 넘어 수린(Surin), 사깨오(Sa Kaeo), 시사켓(Si Sa Ket) 등 국경 5개 주로 확산됐다.

캄보디아 공보부 장관 넷 페악트라(Neth Pheaktra)는 태국의 포격으로 오다 민체이와 프레아 비헤아 주에서 민간인 4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다. 10일 현재까지 최소 7명의 군인과 4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으며, 양측 합산 약 50만 명의 피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태국 정부는 수린 지역 대학에 대피소를 마련하고 벙커를 개방하는 등 전시 체제로 전환했다.

SNS에 올라온 일부 사진/보도 영상 캡춰


양국의 태도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캄보디아 훈 마네트(Hun Manet) 총리의 최측근이자 총리 자문역인 수오스 야라(Suos Yara)는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 당장이라도 대화 테이블에 앉을 준비가 되어 있다"며 "1시간 뒤에라도 만날 수 있다"고 즉각적인 양자 회담을 제안했다. 그는 현재 분쟁을 "패자만 있는 게임(lose-lose game)"이라고 규정했다.

반면 태국의 아누틴 찬위라꾼(Anutin Charnvirakul) 총리는 "대화는 없다(There will be no talks)"고 단호하게 선언하며 군사 작전 지속을 천명했다. 막후 실력자인 훈 센(Hun Sen) 캄보디아 상원의장(전 총리)은 페이스북과 텔레그램을 통해 "캄보디아는 평화를 원하지만 영토를 지키기 위해 반격할 수밖에 없다"며 아누틴 총리가 "선거 승리를 위해 자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분쟁 재발의 직접적 계기는 11월 발생한 지뢰 폭발 사건이었다. 태국 국경 수비대원이 순찰 도중 지뢰를 밟아 발목이 절단되는 중상을 입자, 태국 군부는 캄보디아군이 협정 이후 '새로 매설한(newly laid)' 것이라고 주장했다. 캄보디아 국방부는 과거 내전 시기부터 남아있던 불발탄(UXO)이라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누틴 총리는 캄보디아 측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없을 경우 평화 협정 이행을 '유보(suspend)'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누틴 총리의 강경 노선은 내년 3월 29일 예정된 총선과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지난 9월 7일 패통탄 친나왓 전 총리가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임된 후 의회 표결로 제32대 총리에 취임했으나, 그가 이끄는 품자이타이당(Bhumjaithai Party)은 의석수가 69석에 불과해 제1당인 인민당(People's Party, 143석)의 지원 없이는 정부를 유지할 수 없다. 인민당은 아누틴을 지지하는 대가로 취임 후 4개월 이내 의회 해산과 3월 총선 실시, 헌법 개정 추진, 소수 정부 유지 등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쭐라롱콘 대학의 정치학자 팡통 파와카판(Paungthong Pawakapan) 교수는 "아세안 감시단(AOT)의 부재로 인해 어느 쪽이 도발을 시작했는지 확인해 줄 중립적인 제3자가 사라졌으며, 이는 상호 비방과 공격의 악순환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7월 분쟁 당시 양국 정상에게 전화를 걸어 "적대 행위를 중단하지 않을 경우 무역 협상을 중단하고 징벌적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해 휴전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태국과의 무역 협상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했지만 태국 정부는 "관세 협상은 국경 문제와 별개"라며 버티고 있다. 중국 역시 양국에 "자제(restraint)"를 촉구했으나 실질적 중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를 의장국으로 하는 아세안도 당사국인 태국의 협조 거부로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분쟁은 20세기 초 프랑스 식민지 시절 획정된 국경선의 모호성에서 기인한다. 양국은 약 800km의 육상 국경을 공유하고 있으나, 1904년과 1907년 프랑스-시암 조약 당시 제작된 지도와 자연 지형 사이의 불일치로 인해 당렉 산맥(Dangrek Mountains)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지역에서 영유권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특히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ICJ)가 프레아 비헤아(Preah Vihear) 사원의 캄보디아 소유권을 인정한 판결은 태국 내 민족주의 세력에게 '상실감'과 '굴욕'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지난 7월 24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진 1차 무력 충돌에서는 최소 48명이 사망하고 3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캄보디아군은 5명의 군인과 8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며, 태국 측은 16명의 군인과 14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10월 26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 부대 행사에서 양국 총리가 체결한 평화 협정은 적대 행위의 즉각 중단, 중화기 철수, 아세안 감시단 배치 등을 골자로 했다.

분쟁의 장기화는 양국 경제, 특히 국경 무역과 관광 산업에도 타격을 주고 있다. 태국 동부 경제 회랑(EEC)과 캄보디아 서부 지역을 잇는 물류가 마비되면서 일일 수백만 달러의 무역 손실이 발생하고 있으며, 12월 성수기를 맞은 관광 산업도 안보 불안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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