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편집의 산증인이자 ‘시간의 조율사’로 불린 김현 편집감독이 13일 저녁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6세. 유족에 따르면 그는 2019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6년간 투병생활을 이어왔다. 1948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1969년 영화계에 입문한 이래 185편의 작품을 편집하며 한국 영화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통과한 거장의 타계는 영화계에 깊은 상실감을 남겼다.
김현은 영화인 이전에 지독한 영화광이었다. 정식 데뷔 전, 마이크 니콜스의 영화 졸업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극장에 몰래 숨어들어 필름 프린트를 펼쳐놓고 점프컷 장면의 프레임 수를 직접 세어가며 편집의 개념을 익혔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작품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열렬히 사랑한 팬이기도 했다. 이런 영화광적 열정은 그를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서사의 흐름을 재구성하는 ‘작가적 편집자’로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1969년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 입사한 그는 무비올라를 돌려 필름을 물리적으로 잘라 붙이는 고된 노동 속에서 수천 번의 가위질로 ‘컷’의 감각을 체득했다. 멜로·액션·사극 등 다양한 장르를 다루며 호흡과 리듬을 익혔고, 1972년 ‘궁녀’로 공식 데뷔했다. 그러나 1978년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가 북한에 납치되면서 신필름은 붕괴했고, 김현 역시 영화계를 떠나 5년여의 공백을 가졌다. 이 시기는 한국 영화의 ‘암흑기’였지만, 그에게는 구시대의 타성에 물들지 않은 감각을 보존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4년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그는 청춘들의 여정을 경쾌한 리듬으로 조율하며 한국 영화에 새로운 속도감을 불어넣었다. 이후 독립 편집실을 열어 다양한 감독들과 협업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구축했다. 당시 영화팬들 사이에서는 “한국 영화는 다 김현이 편집한다”는 말이 돌 정도로 그의 이름은 신뢰의 상징이었다.
1980~90년대 그는 어미, 황진이, 기쁜 우리 젊은 날, 칠수와 만수 등 장르를 넘나들며 활약했고, 남부군으로 춘사영화예술상 편집상을,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로 대종상 편집상을 수상했다. 하얀 전쟁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사회 비판적 리얼리즘을, 투캅스와 마누라 죽이기에서는 코미디 액션의 속도감을 완성했다. 1997년 비트에서는 파격적 영상 실험을 수용했고, 같은 해 이창동의 초록물고기에서는 ‘뺄셈의 미학’을 보여주었다. 이후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 등 이창동 감독과의 협업은 그의 편집 철학을 집대성한 작업으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장선우 감독과도 뜻깊은 협업을 이어갔다. 장선우의 꽃잎(1996)에서는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다루는 서사를 날카로운 리듬으로 엮어내며 사회적 메시지를 강화했고, 나쁜 영화(1997)에서는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영상 언어를 편집으로 뒷받침해 한국 영화의 표현 영역을 확장했다. 장선우와의 작업은 김현이 단순히 상업적 성공뿐 아니라 예술적 도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편집자였음을 보여준다.
2000년대 이후에도 그는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 김성수의 무사, 강우석의 실미도 등 굵직한 작품을 통해 멜로와 무협, 블록버스터까지 폭넓은 장르를 소화했다. 2008년 김유진의 신기전으로 제46회 대종상 편집상을 수상하며 꾸준한 기량을 증명했고, 2018년 버닝에서는 후배 김다원과 공동 편집으로 이름을 올리며 세대 간 협업의 의미를 남겼다.
김현은 영화 작업 현장에서 고전영화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조감독과 함께라면 작업을 마친 뒤에도 늦은 밤까지 영화 이야기를 나누곤 했고, 주머니가 가벼운 조감독들에게는 ‘술 사주는 잘 생긴 큰 형님’으로 기억된다. 그는 영화인 이전에 지독한 영화광이었고,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영화사와 고전영화 이야기를 끝없이 풀어내며 후배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편집을 단순한 기술이 아닌 “제2의 시나리오 집필”로 정의했다. 무비올라 세대에서 디지털 편집 시대로 넘어오며 살아남은 극소수의 장인으로, 서사의 경제성과 밀도를 중시하는 ‘뺄셈의 미학’을 추구했다. 어떤 영화든 “더 자를 수 있다”는 신념을 견지하며, 편집자의 직관이 작품의 완성도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했다.
그가 남긴 185편의 작품은 한국 영화사 그 자체다. 1980년대의 고래사냥, 1990년대의 남부군과 투캅스, 2000년대 이후 이창동과의 협업, 그리고 장선우와의 실험적 작업까지,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진정한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변방의 작은 시장에서 세계적 문화 강국으로 성장한 한국 영화의 여정을 가장 깊숙한 곳에서 목격하고 주도한 편집감독 김현의 별세는 한국 영화계에 큰 상실로 기록될 것이다. 영화의 심장 박동을 조율해 온 ‘시간의 건축가’가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빈소는 14일부터 대학로 서울대학교병원에 마련되며, 발인은 16일 거행된다.
◆ 작품 연보
1972: 궁녀
1984: 고래사냥
1985: 어미 (대종상 편집상)
1986: 황진이
1987: 기쁜 우리 젊은 날
1988: 칠수와 만수, 안녕하세요 하나님
1990: 남부군 (춘사영화예술상 편집상)
1991: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대종상 편집상)
1992: 하얀 전쟁,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1993: 투캅스
1994: 마누라 죽이기
1996: 꽃잎
1997: 비트, 초록물고기, 나쁜 영화
1999: 박하사탕, 해피엔드, 이재수의 난
2001: 봄날은 간다, 무사
2002: 오아시스
2003: 실미도 (천만 관객)
2007: 밀양
2008: 신기전 (대종상 편집상)
2010: 시
2018: 버닝 (공동 편집: 김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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