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의무"/유니세프
한국 영화 68년 역사의 산증인이자 약 200편의 작품으로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증언해온 배우 안성기(74)가 5일 별세했다. 그는 지난해 말인 30일 오후 4시경 서울 자택에서 음식물 섭취 중 기도가 폐쇄되면서 심정지가 발생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다. 이후 용산구 순천향대학교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 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2019년 혈액암 진단 이후 6년간 투병하며 불굴의 의지로 현장을 지켜온 안성기의 죽음은 한국 영화계에 거대한 상실을 남겼다. 1957년 5세의 나이로 데뷔해 2022년까지 스크린을 떠나지 않았던 그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과 영광을 연기로 기록한 살아있는 역사였다. 배우로서의 예술혼뿐 아니라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과 30년 유니세프 친선대사 활동을 통해 문화주권과 인본주의를 실천한 그의 삶은 한국 사회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 천재 아역에서 국민배우로: 1950년대~1970년대
안성기는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불과 5세의 나이에 데뷔했다. 한국전쟁 직후 폐허 속에서 시작된 그의 연기 인생은 한국 영화사 그 자체가 됐다. 1959년 《10대의 반항》으로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소년특별연기상을 수상하며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해외 영화제 연기상을 받았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를 비롯해 《부라보 청춘》(1961), 《얄개전》(1964) 등 1960년대 주요 작품에 출연하며 천재 아역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중학교 진학과 함께 약 10년간의 공백기를 가졌으며, 이 시기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에 진학하고 ROTC 장교로 복무했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군인, 지식인, 소시민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는 데 결정적인 자양분이 됐다.
◆ 198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의 중심
1980년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로 성인 배우로 화려하게 복귀한 안성기는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전성기를 열었다. 중국집 배달부 덕배 역을 통해 개발 독재 시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서 소외된 시골 출신 청년의 좌절과 희망을 그려냈다.
1981년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에서는 승려 법운 역을 위해 삭발을 감행하며 세속의 욕망과 탈속의 구도 사이에서 방황하는 지식인의 실존적 고뇌를 표현해 백상예술대상 연기상을 수상했다. 1982년 《철인들》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산업 현장에서의 인간 소외와 노동의 문제를 조명했다.
특히 1980년대는 배창호 감독과의 협업이 빛났던 시기였다.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도시 빈민의 애환을 섬세하게 그려냈으며, 1984년 《고래사냥》에서는 거지 민우 역을 맡아 획일화된 병영 국가 시스템을 탈출해 자유를 찾아 떠나는 로드 무비의 주인공을 연기했다. 1985년 《깊고 푸른 밤》에서 백호빈 역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과 이민 사회의 비극을 그렸으며, 1988년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에서는 간판쟁이 만수 역을 맡아 "말하고 싶다!"는 절규로 고도성장기 한국 사회의 계급적 모순과 소통 부재를 통렬히 풍자했다.
◆ 1990년대 장르 확장과 역사적 트라우마 치유
민주화 이후 1990년대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대에 안성기는 장르를 넘나들며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했다. 1992년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에서 베트남전 참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소설가 한기주 역을 맡아 전쟁의 광기와 인간 파괴를 고발했다. 베트남어과 출신이라는 그의 학문적 배경이 캐릭터 해석에 깊이를 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3년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에서는 부패한 고참 형사 역으로 코미디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며 권위를 해체하고 공권력을 희화화했다. 이는 성역으로 여겨지던 공권력을 비판할 수 있게 된 민주화 시대의 산물이었다. 1999년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는 살인 용의자 장성민 역을 맡아 대사 한 마디 없이 눈빛과 행동만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며 기존의 선한 이미지를 파괴했다.
2000년 김국형 감독의 《구멍》에서는 기억을 잃고 헤매는 중년 외과 의사 역을 통해 실존적 공허와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연을 탐구했다. 헝클어진 머리, 초점 없는 눈빛,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국민 배우'의 정형성을 스스로 파괴하는 파격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 2000년대 천만 배우 시대
2003년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에서 684부대 교육대장 최재현 준위 역을 맡아 "날 쏘고 가라"는 명대사를 남기며 한국 영화 사상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를 이끌었다. 국가의 명령과 인간적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의 모습은 분단 국가의 비극을 상징했다.
2006년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에서는 한물간 매니저 박민수 역을 통해 성공 지상주의 시대에 잊혀진 우정, 의리, 인간애의 가치를 복원했다. 2007년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에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을 이끄는 예비역 대령 역을 맡아 역사의 비극을 대중 영화의 화법으로 전달했다.
◆ 2010년대 이후 생의 마지막까지 현장 지킨 예술혼
노년기에 접어들어서도 안성기는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2012년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에서 사법부의 부조리에 맞서는 교수 김경호 역을 통해 타협하지 않는 지식인의 표상을 보여주며 사회 비판적 영화의 흥행 가능성을 입증했다. 2015년 임권택 감독의 《화장》에서는 깊이 있는 내면 연기를 선보였다.
혈액암 투병 중에도 그는 카메라 앞을 지켰다. 2022년 김한민 감독의 《한산: 용의 출현》, 박흥식 감독의 《탄생》, 신연식 감독의 《카시오페아》를 연달아 촬영했다. 특히 《카시오페아》에서는 알츠하이머 환자를 돌보는 아버지 역을 맡아 병마와 싸우는 본인의 현실과 겹쳐지는 절절한 부성애를 연기했으며, 이 작품으로 제10회 들꽃영화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이들 작품은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배우로서의 소명을 다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됐다.
2022년 김한민 감독의 《한산: 용의 출현》
◆ 스크린 밖의 투쟁: 문화주권과 인본주의 실천
안성기는 스크린 밖에서도 한국 영화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1998년과 2006년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에서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삭발 투쟁에 동참했다. 2006년 2월 4일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1인 시위의 첫 주자로 나서 "문화는 교역의 대상이 아니라 교류의 대상"이라고 역설했다.
당시 그는 "미국 영화는 1년에 600여 편이 만들어지고 300여 편이 수입됩니다. 스크린쿼터라는 보호막이 없으면 거대 자본인 할리우드 영화가 배급망을 독점하게 되고, 우리 영화는 아무리 잘 만들어도 상영될 극장조차 찾지 못하게 될 것"이라며 문화적 다양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6년 칸 영화제 이사회는 이사 20인 전원 만장일치로 한국 영화인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성명을 채택했다. 비록 스크린쿼터는 축소됐으나, 그의 투쟁은 한국 영화계의 단결을 이끌어냈고 오늘날 K-무비가 세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다졌다.
1993년부터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로 30년 넘게 활동하며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몽골, 우간다, 아이티 등 전쟁과 기아의 현장을 직접 찾았다. 한국전쟁 당시 유니세프 분유를 먹고 자란 자신의 경험을 언급하며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는 단순한 홍보 모델이 아니라 자신의 모델료를 기부하고 기업 후원을 유치하는 등 실질적인 기여를 해왔다.
2012년 6월 이병헌과 함께 아시아 배우 최초로 미국 할리우드 그루먼 차이니즈 극장 앞마당에 핸드프린팅을 남겼으며, 2023년 서울대 문리대 총동창회가 제정한 4·19민주평화상을 수상했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장으로서 영화인 자녀 장학금 지원과 단편영화 창작 지원 사업을 이끌며 후배 양성에도 헌신했다.
◆ "시간과 나이는 멈출 수 없다"는 마지막 메시지
안성기는 2022년 12월 대종상 영화제 공로상 수상 영상에서 "오래오래 영화배우로 살면서 늙지 않을 줄 알았고 나이를 잊고 살았는데, 시간과 나이는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며 "건강이 좋아지고 있으니 새로운 영화로 뵙겠다"고 말했다. 이 말은 자연의 섭리를 담담히 받아들이면서도 끝까지 배우로서의 소명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언을 의미한다. 한국 영화가 검열의 시대를 견디고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는 모든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보고 이끌어온 산증인이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약 200편의 필모그래피와 문화주권 수호의 정신, 인본주의 실천의 유산은 한국 영화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배우라는 직업이 단순히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이 아니라 시대를 증언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공인이 될 수 있음을, 그는 68년의 삶으로 증명했다.
한국 영화계는 깊은 애도와 함께 그의 예술혼과 투쟁정신을 계승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안성기가 평생 외친 "문화는 교역의 대상이 아니라 교류의 대상"이라는 메시지는 글로벌 OTT 플랫폼 시대를 맞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화외교의 좌표로 남아있다.
‘제4회 4·19 민주평화상’ 시상식에서 수상자로 선정된 배우 안성기
#안성기 #국민배우 #한국영화사 #스크린쿼터 #문화주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