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유엔에서 연설하는 트럼프/백악관 자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7일 66개 국제기구에서 동시 탈퇴하는 행정각서에 서명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근본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기후변화, 인권, 개발협력 등 인류 공동의 과제를 다루던 핵심 기구들로부터의 철수는 단순한 외교 전술 변화를 넘어, 미국 외교의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는 분석이다.
이번 결정은 지난해 2월 발령된 행정명령 14199호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국무부 장관에게 미국이 가입한 모든 국제기구와 조약에 대해 '미국 국익 부합 여부'를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약 1년간의 검토 끝에 주권 침해, 재정 비효율성, 이념적 편향성 등을 이유로 66개 기구가 탈퇴 대상으로 확정됐다.
마코 루비오(Marco Rubio) 국무장관은 해당 기구들을 "미국의 국익에 반하거나,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인" 집단으로 규정했다. 그는 국제기구가 "진보적 이데올로기"와 "기후 정통성"을 전파하는 도구로 전락했다고 비판하며, 이번 조치가 미국의 주권을 보호하고 재정을 효율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 기후 체제 전면 이탈...과학적 합의 부정
가장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은 기후변화 분야다. 미국은 파리협정 탈퇴를 넘어 1992년 리우 회의에서 채택된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자체에서도 탈퇴를 선언했다. UNFCCC는 미국 상원이 비준한 조약으로, 국제 기후 체제의 법적 토대다. 이는 대통령이 상원 비준 조약을 단독으로 파기할 수 있는지에 대한 헌법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기후 과학의 최고 권위 기구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로부터의 탈퇴는 미국이 더 이상 과학적 합의에 기반한 기후 정책을 펴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2024년이 역사상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되고 기상 이변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나온 결정이라는 점에서 국제 사회의 우려가 크다.
한국 인천 송도에 본부를 둔 녹색기후기금(GCF)에서도 철수하기로 했다. 미 재무부는 GCF를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급진적 기구"로 규정했다. 최대 공여국인 미국의 이탈은 GCF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기후 금융 허브'를 지향하는 송도의 위상에도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 인권·법치 영역서도 대거 철수
인권과 사회 분야에서도 대규모 탈퇴가 이뤄졌다. 미국은 유엔여성기구(UN Women)와 유엔인구기금(UNFPA)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백악관은 이들 기구가 낙태 권리 옹호와 젠더 이데올로기 확산에 앞장선다고 비판했다. 이는 전 세계 여성 인권 및 보건 증진 사업에 심각한 재정적 타격을 입힐 것으로 예상된다.
법치와 민주주의 확산을 위한 국제법위원회(ILC)와 베니스위원회에서도 탈퇴했다. 이는 미국이 더 이상 국제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 '예외적 국가'로 남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법을 통한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서구의 이상이 후퇴하고, 국제 관계가 '법의 지배'가 아닌 '힘의 지배'로 되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경제 분야에서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와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 산하 지역 경제 위원회들로부터 대거 철수했다. UNCTAD는 전 세계 무역 통계와 해운, 물류 데이터를 생산하고 개도국의 무역 역량 강화를 지원해왔다. 미국의 이탈은 글로벌 무역 데이터의 정합성을 떨어뜨리고, 신통상 규범 제정 과정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스스로 약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 중국, '다자주의 수호자' 자처
미국의 퇴장은 중국에게 전략적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 마오닝(毛寧) 대변인은 미국의 탈퇴 발표 직후 "중국은 다자주의를 견지하고 유엔의 핵심 역할을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은 UNCTAD, UNFCCC 등에서 미국의 공백을 메우며 '글로벌 사우스'의 대변자 역할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안보 위기 속에서 미국의 군사적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라 정면 충돌을 꺼리는 분위기다. 유럽 지도자들은 파리협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미국을 직접 비판하는 강경 발언은 자제하고 있다. 대신 자체적인 기후 리더십을 강화하고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을 통해 미국 정책 후퇴의 부정적 영향을 차단하려 하고 있다.
유엔 대변인은 회원국의 분담금 납부가 유엔 헌장에 따른 "법적 의무"임을 명확히 했다. 미국의 일방적 지급 중단은 국제법 위반 소지가 크며, 투표권 상실 등의 제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 '가치 지향적 실용주의' 시험대
한국은 미국의 일방주의와 중국의 수정주의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졌다. GCF 본부 유치국으로서 최대 공여국의 이탈을 막아야 할 책무가 있지만, 한미 동맹 관리 차원에서 강하게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유럽연합, 일본, 호주 등과 연대해 'GCF 긴급 안정화 기금' 조성을 주도하고, 미국에게는 GCF가 개도국 시장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경제 안보적 자산'임을 설득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미국이 인권과 다자주의를 옹호하던 존경받는 국가로 남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인류 공동의 위기 앞에서 국가 이기주의가 인본주의를 압도하고, 자연의 경고를 외면하는 현실은 현대 문명의 윤리적 위기를 드러낸다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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